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천의 모양과 그로부터 나온 기운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소위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풍수지리설은 인간과 세상 특히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미리 예언할 수 있다는 소위 도참사상과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크게 의존했으며,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융성, 영속시킬 수 있다는 것에서 수도 이외의 땅에 삼경과 삼소를 설치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고려 문종 역시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져 문종 21(1067)년에 지금의 서울인 양주를 남경으로 고치고, 다음 해 남경에 신궁을 건설했습니다. 이 신궁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고려 숙종은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남경 궁궐자리는 여러 곳이 거론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삼각산 면악의 남쪽이 채택되었습니다. 면악이란 산의 모습이 얼굴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로부터 북악산은 호랑이 또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판문하부사 권중화ㆍ판삼사사 정도전ㆍ청성백 심덕부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ㆍ사직ㆍ궁궐ㆍ시장ㆍ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북북서쪽을 뒤로하고 남남동을 앞으로 향한 방향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의 산을 주맥으로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태조실록』3(1394)년 9월9일
위는 비록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이를 통하여 볼 때 숙종 때의 남경 왕궁은 지금의 경복궁보다 더 북쪽,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왕궁 건설은 숙종 6(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을 만들어 10월에 시작하여 숙종 9(1104)년 완성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왕은 경복궁에서 거처 했으며, 청와대는 그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시기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서는 회맹을 실시했습니다. 회맹이란 왕이 공신 및 역대 공신의 적장자손들과 함께 회맹단에서 천지신명 앞에 맹서하고 봉군,봉작 등 논공행상을 행하는 의식입니다.
이 회맹단은 그림과 기록을 통하여 지금의 신무문 밖 북동쪽 부근에 있었다고 보며, 여러 기록을 검토할 경우 이 회맹단를 포함한 인접 지역은 민가를 지어 거주할 수는 없었지만 회맹의 예식을 거행하는 특별한 날 이외의 평상시에는 비교적 자유스럽게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는 마을도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 이름은 북동 또는 대은암동입니다. 이 가운데 북동은 『태종실록』4(1404)년 11월 4일 기록 가운데 경복궁의 북동에서 회맹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회맹단을 포함한 마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경복궁 후원에는 충순당, 접송정, 취로정, 서현정, 관저전등의 전각이 있습니다. 이 전각들은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간략하게나마 전하는 아래의 『경복궁』 그림과 『실록』 등을 통하여 대부분 오늘날 청와대와 인접한 경복궁의 북쪽 궁장 안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경복궁으로 돌아와 충순당에 들었다. 충순당은 궁장 밖에 있어 대내(大內)와 서로 막혔는데, 이때부터 종상까지 궁중에 들어가지 않고 항상 이 당(堂)에 거처하였다.
『문종실록』즉위(1450)년 6월 25일
내농작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하였는데, 왼편은 경회지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 안까지 이르렀고, 오른편은 충순당 앞 섬돌로부터 취로당 앞까지 이르렀다.
『중종실록』9(1514)년 1월 14일
위는 비록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이를 통하여 볼 때 숙종 때의 남경 왕궁은 지금의 경복궁보다 더 북쪽,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왕궁 건설은 숙종 6(1101)년 9월 남경개창도감을 만들어 10월에 시작하여 숙종 9(1104)년 완성되었습니다.
「경복궁도」
조선 영조 43(1767)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2006년, 77면 전재
앞 그림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청와대 지역을 거쳐 뻗어 내려온 백악산의
산줄기가 있고, 그 외에 건춘문 근처 비현각 남쪽에도 작은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신무문을 현무문으로 표기한 점이 특이합니다.
현무문 동쪽 수문 아래 동쪽방향에서 서쪽방향으로 무송정, 취로정,
서현정, 충순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연못은 취로정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이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고종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당시 대왕대비에 의하여 중건되기 이전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던 약 270여 년 간의 기간입니다.
지금의 청와대 지역은 대체적으로 앞 시기와 마찬가지의 양상이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다만 폐허 상태인 경복궁으로 인하여 이전 보다 더욱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상태였다고 짐작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정선의 그림 「은암동록」 과 「취미대」,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 살았던 김상헌의 시 「회맹단」 중 ‘사람이 없어 허공이 적막하다’라는 구절, 그리고 회맹단 부근에서 활쏘기를 할 수 있었다는 아래 기록 등을 통하여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 경복궁의 신무문 밖에서 회맹할 때 전하께서 앉으셨던 단이 있는데, 그 전부터 무사가 모여 활 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한 재신이 어제 떼 지어 모여서 마구 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금지시키니, 그 중의 두 무사가 팔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하여, 거의 구타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국법으로 금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여, 지위가 높고 낮거나 모두 하지 않아야 하는데, 저들이 이미 스스로 금령(禁令)을 범하였고, 또 조정의 귀인을 업신여겼으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사핵(査核:실제 사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힘)하여 드러나는 대로 형률에 의해 죄를 결정하고, 어단에 모여서 쏘는 것을 엄단하라고 거듭 명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28(1702)년 10월 27일
고종(高宗: 재위 1863~1907년)이 즉위하면서 경복궁이 복원되어 다시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한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의 약 50여 년간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 지금의 청와대 자리, 즉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신무문 밖에 지은 후원에는 고종 5(186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에 걸쳐 융문당, 융무당, 비천당 등 488칸의 건물이 각각 들어섰습니다. 이후 고종 30(1893)년 경농재 등을 지었고, 1905년 8월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침류각을 옥련정 인근에 지었으며 융무당의 동남편에는 수궁과 금위군직소 등 군사용 건물이 담장으로 구획된 독립 권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후원의 건물 배치는 「북궐도형」을 통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됩니다. 이 「북궐도형」과 1907년경에 만든 『궁궐지』에는 후원 건물이 모두 256칸 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후원 건물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거나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궁궐지」에 수록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기록
경 복궁은 고종 33, 건양 1(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했습니다. 고종이 이어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했습니다.
1912년 경복궁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 건물에서 조선총독부 통치 5주년 을 대내외에 알리고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추진했습니다. 공진회는 경복궁 부속 건물을 이용하거나, 많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다수의 가건물을 지었습니다.
이 공진회 때 후원의 왕궁 건물들도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은 경복궁터에 1926년 10월 1일에 새 총독부 건물을 완성했습니다. 이 건물은 1945년 해방 이후로도 존속되어 중앙청, 국립중앙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 철거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옛 후원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으로 개최한 기념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습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습니다.
경복궁과 청와대 일대(1926년 이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 (1910~1945)』
2002년, 158면 전재
2 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 일본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독립된 새로운 민주 국가 건설을 준비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온 국민과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미군정의 최고 책임관인 군정장관 하지 중장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있었던 옛 총독 관사를 이어 받아 관사로 사용했습니다. 이 건물은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인계되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이용되었습니다.
제 1공화국 시기에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 이름은 일제 강점기 때의 명칭인 경무대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명칭은 이승만 대통령이 총독의 관사 명칭, 나아가 일제 강점기의 명칭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조선 고종 때 인재 등용의 현장인 경무대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무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 재임기간 중인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로 공식 개명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본관 건물에 ‘푸른 기와’를 덮은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청와대란 명칭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며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 등으로 사용되는 지역 및 건물의 총체적 명칭이 되었습니다.
1960년 당시 청와대 정문 앞
국정홍보처,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4(1959-1960)』 전재
1960년 7월 20일 4ㆍ19 당시 경무대 앞 발포현장을 검증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서 현재보다 어린 지금의 반송을 볼 수 있습니다.